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사벨 1세 (문단 편집) === 후계자들 === [[파일:external/1.bp.blogspot.com/TESTAMENTO+DE+ISABEL+LA+CATOLICA-Eduardo+Rosales.Museo+del+Prado.jpg]] 그녀는 1504년 11월 25일에 53세로 세상을 떠났다. 무덤은 [[그라나다(스페인)|그라나다]]에 있는 왕실 대성당에 있는데, 남편 [[페르난도 2세|페르난도]]와 딸 [[후아나(카스티야)|후아나]], 사위 [[펠리페 1세|펠리페]]까지 다같이 묻혀 있다. 그녀와 페르난도 사이엔 1남 4녀가 있었지만, 아들 후안은 어릴 때 사망했고 포르투갈의 왕비였던 장녀 이사벨은 [[https://en.wikipedia.org/wiki/Miguel_da_Paz%2C_Prince_of_Portugal|미겔 왕자]]를 낳다가 사망했기에 이사벨 여왕 사후에는 차녀인 후아나가 카스티야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후아나 여왕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Juana la loca(광녀 후아나)가 됐다. 하지만 후아나가 주술이나 마법에 심취하는 등의 이상 행동을 보인 원인은 남편의 바람기였다. 문제는 후아나의 광기가 남편이 죽고 나서도 나아지지가 않았던 것이다.] 남편 페르난도 2세와 사위 펠리페 1세가 카스티야의 섭정 자리를 놓고 서로 다퉜고, 이후 펠리페가 섭정하는 걸로 결론이 난다. 하지만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카스티야에 온 지 단 두 달 만에 펠리페가 갑자기 사망하면서 페르난도 2세가 섭정을 맡는다. 겉으로는 간단히 정리된 것 같지만, 펠리페의 사망에 독살 의혹이 있고 아라곤의 왕으로 어디까지나 섭정 자격인 페르난도 2세가 새로이 후계자 아들을 갖기 위해 재혼을 하고 카스티야인들은 이를 싫어하는 등 아라곤 왕국의 후계자 문제와도 관련이 있었기 때문에 상황이 상당히 복잡했다. 이 문제는 나중에 페르난도 2세가 새로운 부인 [[https://en.wikipedia.org/wiki/Germaine_of_Foix?wprov=sfla1|제르멘 드 푸아]]와의 사이에서 결국 자식을 갖지 못한 채 사망하고, 외국에 있던 후아나 여왕의 아들 [[카를 5세]]가 어머니와 공동통치하는 형태로 즉위하면서 해결되었다. 이때 실권은 전적으로 손자 카를에게 있었기 때문에, 스페인 역사에서 통일 스페인 왕국의 첫 국왕은 [[카를 5세]]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상세한 내용은 [[카를 5세]] 항목을 참고. 참고로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넷째 딸이 [[헨리 8세]]의 첫 번째 아내이자 [[메리 1세]]의 어머니인 [[아라곤의 카탈리나]]이다. 그녀의 치세에서 오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개종하지 않은 [[이슬람]]교도를 이베리아 반도에서 추방하고 1492년《알함브라 칙령》을 발표하여 [[유대인]]도 추방한 일이다. 이는 이슬람 및 유대인들은 물론, 개념있던 기독교 인사들에게도 비난을 받았는데 그라나다 왕조를 멸망시킬 당시 마지막 이슬람 왕인 보아브딜이 항복하며 물러날 때 조건으로 약속한 이슬람인과 유태인들의 종교적 자유를 반드시 허용해 줄 것을 어겼기 때문이다. 덕분에 북아프리카 및 이슬람권 지역 기독교인들은 그 분풀이로 똑같이 추방당했기에 이들이 스페인으로 와서 니들 땜에 우리가 이 꼴이 되었으니 받아달라고 분노했다. 물론 그래도 같은 기독교인이니 받아주긴 했으나, 오랫동안 비기독교 지역에 살던 이들 다양한 기독교인들은 기존 스페인인들과 공존이 아주 잘 되지는 못했다. 게다가 이 칙령의 근본적인 큰 이유는 바로 '''돈'''이었다. 돈이 없어서 가장 만만한 유대인들을 족쳤고 유대인들은 너무 짦은 기간에 재산을 처분하고 떠나야 했는데 그나마도 금, 은같은 물건들은 국외 반출을 금지당했다. 대부분의 재산을 강탈당한 유대인들은 유럽 여기저기로 떠돌게 된다. 단기적으로 보자면 가톨릭 단일신앙으로 국가 대통합을 이루고 국내 안정, 영토 확장과 자금 확보 등을 이룬 셈이나 장기적으론 유대인의 제거가 스페인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됐다고도 본다. 국내 금융업이 통째로 날아갔으니 이걸 다른 자들이 커버했어야 하는데, 곧 신대륙 황금뽕을 빨게 되면서 굳이 대처를 안 하게 되었다. 쫒겨나간 금융업 전문가 유대인들은 스페인에 감정이 좋을 리 없었고, 그 상태로 증손자 펠리페 2세의 치세 시기까지 와버리면서 해외 영토가 급격히 발견되고, 이로 인해 유럽 각국은 전쟁과 파산이 줄지어 일어나면서 금융에 서툴렀던 나라들은 점차 그야말로 빚에 깔리게 된다.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게 된 손자인 [[카를 5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도 겸임하면서 낭비가 극심했고, 엄청난 빚을 졌다. 증손자 [[펠리페 2세]]는 그야말로 해가 지지 않는 스페인 최전성기의 호시절을 누렸지만, 그때까지도 아메리카를 통해 확보한 그 엄청난 보유량에 비해 금과 은의 정밀한 제련법 등은 발달하지 않아 스페인의 경제는 전반적으로 매우 투박하게 굴러갔다. 치러야 할 전쟁과 빚은 더 불어났고 펠리페 2세는 파산도 네 번이나 겪었다.[* 통치 행정 시스템은 편집증적으로 정비했다지만 경제는 그만치 깊게 생각하지 않은 듯.] 그리고 당시 스페인 내에서 무어인 등 무슬림들은 농업과 제조업에 주로 종사했는데, 이사벨이 완료한 [[레콩키스타]]를 기조로 삼아 펠리페 2세 때까지도 끊임없이 이들을 탄압하고 쫓아내고 북아프리카 쪽의 혼란을 방조하면서 이후 결과적으로는 스페인 반도 내에선 농업-식량확보도 망하게 됐다. 당대엔 식민지로부터 풍부한 수입에 의존할 수 있었으나, 식민지를 잃었을 때의 본국엔 발전된 인프라가 부족하게 된다. 이사벨이 얻어낸 아메리카 등 머나먼 해외 식민지에 눈이 돌아간 이 후세들은, 가까운 지중해 근방의 이슬람 세력과는 영영 멀어졌고, 독실한 카톨릭 신앙을 기반으로 한 스페인의 이러한 통일성은 '유럽 최강자', '카톨릭 진영의 군주'로서의 자긍심에 힘입어 문화적 보수성, 폐쇄성을 견고하게 만들었다. 쉽게 요약해서 이사벨은 '''나라를 완성하고 부강하게 해 대제국의 시작을 열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근본적인 동력을 약화시키는 단초에도 기여한 왕'''이 됐다고도 볼 수 있다. 한마디로 달도 차면 이지러지듯이, 그녀가 이룬 성공을 기반으로 오만해진 후세들이 영광은 영광대로 누리면서 그 과정에서 발생한 문제들을 제대로 인식, 보완하지는 못해 그 영광의 이면이었던 단점도 그대로 끌고 가버린 사례.[* 물론 부잣집은 망해도 삼 년은 간다고, [[스페인]]은 물론 그녀의 또 다른 손자인 페르디난트의 후손 계열인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까지 더하면 이사벨(과 후아나)의 후손들은 최전성기를 지나고도 매우 오랫동안 전 유럽에서 크나큰 위상을 떨쳤다. 이후의 거듭된 이 가문(특히 종가에 해당하는 스페인 합스부르크)의 폐쇄적인 근친혼은, 선대가 이룬 성공에 안주해 다른 활로를 찾지 못하고 천천히 몰락해가는 왕조의 모습을 여실히 보여줬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